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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세계

앎의 나무

by Poblor(파블러)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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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나무

 

2007

움베르또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인식의 생물학적 뿌리를 이해하기 위한 대안적 관점을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식이 바깥에 있는 '바로 저' 세계의 표상이 아니라 삶의 과정 속에서 '어느 한' 세계를 끊임없이 산출하는 일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어느 것이 진짜 색깔인가? - 우리가 바라보는 물체의 색이 그 물체를 떠나온 빛의 속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활동이 세계를 산출함

 

섭동(작용); 부정적 의미가 꽤 담긴 '방해'와 달리 어떤 체계의 구조에서 일어나는 상태변화가 환경의 어떤 상태에 의해 바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유발'됨을 가리킨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말한 것은 모두 어느 누가 말한 것이다." - 한 세계를 산출하는 성찰 자체는 언제나 어느 한 개인이 어느 한 장소에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체가 '저기 바깥에' 있다는 경험은 인간의 구조에 의해 특수한 방식으로 형성된다. 이런 뜻에서 인간의 구조는 기술활동을 통해서 생겨나는 '물체'의 가능조건이다. 이러한 순환성, 행위와 경험의 뒤얽힘, 한편으로 우리의 존재방식과 다른 한편으로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 다시 말해 인식활동이 세계를 산출함을 뜻한다.

인식의 기초에 관한 성찰도 언제나 언어 안에서 일어난다. 언어는 우리의 출발점이자 인식 도구이자 문제이기도 한다.

 

모든 인식활동이 저마다 한 세계를 산출하므로 우리의 출발점은 생물이 자신의 존재영역에서 벌이는 효과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과학적으로 타당한 설명을 내놓기 위한 우리의 출발점은 인식을 효과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다. 곧 한 생물이 특정 환경에서 자신의 세계를 산출함으로써 그 환경에서 생존을 지속케 해주는 행위로 인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관찰자의 관점에서 볼 때 개체와 환경의 재귀적 상호작용은 둘의 상호섭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환경의 구조는 자기생성개체의 구조에 변화를 유발할 뿐, 그것을 결정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이것은 거꾸로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개체와 환경이 해체되지 않는 한, 이런 재귀적 상호작용은 구조변화를 서로 주고받는 역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조접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모든 결정론에서 벗어나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길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가 우리를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로 봄으로써 우리의 병을 치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신체적 성질과 행동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경계가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이 유기체의 일부로서 작업할 수밖에 없으며 매순간 유기체의 구조적 결정과정에 기여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오직 특정 섭동작용을 받는 망막부위와 혀, 입, 목, 나아가 개구리 몸 전체를 움직이는 근육수축 사이의 내적 상관관계뿐이다.

관찰자는 그것을 외부세계의 지도에 근거한 계산활동이라고 기술할지 모르지만, 개구리에게 그런 계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경계에 대한 통속적이고 지배적인 견해에 따르면 신경계란 유기체가 환경에서 가져온 정보들로 세계에 대한 표상을 만들고 또 이것을 바탕으로 생존에 필요한 행동을 계산하는 데 쓰는 도구다. 환경 자체의 특징들이 신경계에 입력되면 신경계가 이것들을 이용해 행동을 산출한다. 그러나 신경계란 유기체의 일부로서 구조에 따라 작업할 뿐이다. 따라서 환경의 구조는 신경계에 변화를 유발할 뿐 그것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관찰자인 우리는 신경계와 환경의 구조를 함께 살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신경계가 환경에 대한 표상들을 가지고 작업하여 유기체의 행동이 생기는 것처럼 또는 마치 행동이 어떤 목표지향적인 과정의 산물인 것처럼 기술할지 모른다.

우리는 환경에서 '정보'를 가져와 그것을 '안에서' 모사한다는 식의 비유를 써서 우리의 경험을 기술할 때가 많다.

 

유아론이란 오로지 자기의 내면세계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고전적인 철학전통이다.

유아론과 표상주의의 두 함정을 자연스럽게 피해갈 방법은 논리적 장부기재를 유지하는 데 있다

 

개체와 환경 사이의 상관관계를 산출하는 것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자 자신이다.

 

'행동'이란 관찰자가 특정 환경에 관련시켜 운동 또는 행위로서 기술하는 생물의 자세변화 또는 위치변화이다.

잠수함 안의 조종사에게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계기가 가리키는 것들과 그것들의 변화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 특정 관계를 산출하는 방법 뿐이다. 잠수함과 주위 환경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우리에게만 잠수함의 '행동'이 존재한다.

 

유기체가 자신의 환경 안에서 겪는 상태변화를 우리가 행동으로 기술한 경우, 우리가 규정한 환경 안에서 유기체의 운동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생물 안에는 오로지 상태변화가 있을 뿐이므로, 행동이란 생물 자체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리키는 어떤 것이다.

 

운동뉴런들과 감각뉴런들 사이에는 중간뉴런들이 모여 커다랗게 부푼 모양을 한 두뇌가 있는데,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성 속에서 둘을 1:100,000:10의 비율로 연결하고 있다.

 

유기체의 인식활동이란 유기체가 살아가는 구조접속의 영역 안에서 감각작용적 상관관계로서 일어나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상호작용하는 유기체 안에서 일어나는 뉴런그물체의 끊임없는 미시적 변화가 정확히 어떤 기제를 따르건 우리는 그런 변화를 국부적으로 한정하거나 또는 각 경험에 그런 변화가 하나씩 대응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느 개의 머릿속 한 구석에 그 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첫째로 신경계 안에서 유발된 모든 구조변화는 뉴런그물체 안에서 일어난 상대적인 흥분의 변화이므로 널리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행동이란 이런저런 행위들을 관찰자가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이란 관찰자인 우리가 유기체와 환경을 동시에 살핌으로써 나타나는 상대적인 현상이다.

같은 종의 개체들이 보이는 행동이 오직 상호작용의 특수한 역사가 있을 때만 발달하는 구조를 바탕으로 할 때 사람들은 그런 구조를 가리켜 개체발생에 따른 것이라 하고 또 그런 행동방식을 가리켜 학습된 것이라 말한다.

 

인식 또는 앎

특정 맥락에서 효과적인 (또는 적절한) 행동을 관찰할 때 우리는 인식 또는 지식이란 말을 쓴다.

 

학습이나 기억을 환경에서 어떤 것을 '입수'한 결과로 생긴 행동변화현상으로 보기 쉬운데, 이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은 신경계가 표상을 가지고 작업함을 전제한다.

 

삶이 곧 앎이다. - 생명활동이란 생물로서 존재하는 데에 효과적인 행위이다.

 

신경계는 서로 보충하는 두 방식으로 인지현상에 관여한다. 이 방식들은 신경계가 메타세포체의 일부이자 작업적으로 닫힌 뉴런 그물체라는 특별한 작업양식에서 나온다. 첫째 방식은 유기체가 띨 수 있는 상태들의 폭을 확장하는 데 있다. 다양한 감각운동적 상관관계들이란 신경계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생기며, 이 다양함이야말로 신경계가 유기체의 작업에 관여하는 핵심을 이룬다.

둘째 구조접속의 새로운 차원들이 유기체에게 열림으로써 가능해진다.

 

언어적 영역

개체발생적이고 의사소통적인 행동(곧 유기체들 사이의 개체발생적 구조접속을 통해 생긴 행동)을 언어적 행동이라 부른다. 우리는 어떤 유기체가 보이는 언어적 행동방식들 전체의 영역을 그 유기체의 언어적 영역이라 부른다. 언어적 영역은 보통 가변적이며, 그것을 산출하는 유기체들의 개체발생과 함께 변화한다.

 

언어

언어적 영역 요소들을 대상으로 다시 언어적 구분을 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자가 확인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언어 안에서 작업하고 있다. 언어란 낱개의 행동단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언어 안에 존재'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언어 안에서 존재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성찰적 과정 속에서 언어적 구분을 언어적으로 구분할 때 우리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어 안에서 작업한다는 것은 서로 일치하는 공동개체발생적 구조접속의 영역에서 작업함을 뜻한다.

 

언어의 근본 특징이란 언어를 가지고 작업하는 이에게 주위 상황과 자기 자신을 기술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언어적 성찰을 두 뇌반구로 따로따로 산출할 수 없었던 다른 환자들과 폴 사이의 차이는 언어적 재귀현상인 언어가 없으면 자기의식도 없음을 보여준다.

정신이란 것을 경험하는 데 언어가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나 또는 자기가 언어 안에서 비로소 생긴다. 

정신이란 사회적, 언어적 접속의 그물에서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지, 내 머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의식과 정신은 사회적 접속의 영역에 속하며, 그 영역에서 의식과 정신의 역동성이 작용한다.  

 

인식활동은 언어를 구성하는 행동조정을 통해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세계를 오히려 산출한다.

 

곧 인식(활동)이란 객체들과 아무 관계도 없다. 인식활동이란 교화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인식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산출한다.

 

앎을 알면 얽매인다.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이나 타인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리

 모든 인간적 행위는 언어 안에서 벌어진다. 언어 안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행위가 한 세계를 산출한다.

 

우리가 가진 세계란 오직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이다. 그리고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우리는 이 세계를 산출할 수 있다.

 

자기생성조직이란 구성요소들의 생성그물로 정의된 개체인데, 1) 그것들을 생성하는 바로 그 생성그물에 재귀적으로 관여하며 2) 그것들이 있는 공간에서 생성그물을 개체로서 실현한다.

 

자기생성체계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오직 자기생성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자기관련적으로 행동한다.

자율적 체계의 인식능력이란 주어진 문제(이를테면 환경에서 온 정보)를 푸는 능력(이 세계를 알기)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어느 한 세계를 만들어내기)이다.

생물과 한경의 '구조접속'이란 말을 쓰는 까닭도 둘의 관계를 기술하는 데 정보, 명령, 선택, 최적화 등을 가정하지 않은 채(그것은 객관적 준거를 가정하고생물을 '열린 체계'로 봄을 뜻하므로) 둘이 서로를 정의하는 방식, 곧 공진화의 기제를 찾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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